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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쩜셋을 기다리며...koMon, 05 Oct 2026 17:56:33 +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뻥구라닷컴http://blog.jinbo.net/attach/41/132452319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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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50음쩜셋을 기다리며...제9회 지선 후 선관위 뻘짓으로 인한 재선거 논란을 보며 일단 생각을 정리
http://blog.jinbo.net/hi/2398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사건'의 복잡함에 마주하여 머리 속이 마구 헝클어질 때, 심호흡을 하면서 내 기준을 다시 살피는데, 내가 비록 겉핥기 수준이긴 하지만 나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존심 덕분에 전공과 관련한 몇 가지 생각의 틀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공과 관련하여 내 오랜 숙제(멋진 말로 하면 '화두'쯤 되겠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멋진 말이 내겐 가당찮은 거 같으므로)는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인권이었고, 실천적 차원에서는 정치의 동학과 주체의 삶이었다(하,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제법 거창해 보이긴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난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이 민주주의의 특성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효율과 비용을 이야기하는 것에 극도로 주의했다. 비록 대의제가 현실 민주주의의 절차적 대세가 될 수밖에 없고, 그 대의제야말로 민주주의를 비용대비 효율에 기반하여 다루는 대표적 사례임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물론 비용 대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단기적으로는 부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긍정적이기에 민주주의의 장점이 거기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 미래에 지금의 나비짓이 태풍이 될지 아니면 지진이 될지를 예측할 수 없다. 그저 지금 이렇기에 이러하다는 면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난 대의제의 효용은 그것이 그나마 현실에서 가장 합의 가능한 범주를 구획한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비용과 효율의 측면이 아니라. 주의해야 할 점은 대의제가 정형화된 형태로 고착되고 거기에 관료주의가 결합하면 효율과 비용의 문제를 이유로 정치를 질서와 치안의 문제로 대체한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때 진보진영에서 직접민주주의 3종 세트(발안권, 소환권, 투표권) 도입을 진보적 정치개혁과제로 들고 나온 적이 있다. 난 한국 정치현실에서 직접민주적 제도들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진보적 정치개혁과제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직접민주제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각 제도들, 예컨대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제는 돈 없고 힘 없는 데모스들이 써먹기보다는 돈과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기득권층에게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 이걸 자꾸 진보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된다. 더구나 직접민주제는 대의제의 기능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동원될 수 있다.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걸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난 이런 문제의식을 이 블로그에 여러 경로로 밝힌 바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직접민주적 제도들이 필요한 이유는 대의제가 강화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정치를 질서와 치안으로 치환하는 부작용을 제어하는 장치로 역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민주적 제도들이 민주주의의 본원적 특성, 즉 어쩔 수 없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고 고비용일 수밖에 없는 특성에 더 부합하기도 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난 지금도 대의제의 대체제로서 직접민주제를 제시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공동체의 규모, 의제, 주체의 구성 등에 따라 절차적 방식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전개할 수 있다.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선거제, 추첨제, 숙의제, 만장일치제, 직접소환 등 제도를 맞춰서 사용하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주주의의 어지러움은 주체에서도 나타난다. 난 뭐든 일단 누가 그 말을 하는가, 누가 그 일을 하는가를 먼저 살핀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그가 누군지에 따라 일단 판단의 시간과 방향이 달라진다. 조선일보가 분절화된 노동의 양극화 문제를 심각하다고 할 때, 윤석열이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 그 내용이 아무리 그럴싸하더라도 일단 이런 싸패들의 말은 판단과 결정을 유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주주의는 데모스의 정치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막상 데모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단적으로 이거다라고 하기 어렵다. 이미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데모스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권리의 행사를 보장받은 사람, 공동체에서 일정한 발언권을 가진 사람, 국가 안에서 주권을 부여받은 사람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데모스라는 개념 자체는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이라는 실체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들은 일정한 제도적 기준에 근거한 권리가 부여되기 이전의 존재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데, 공동체라는 범주 안에서 민주주의적 질서체계를 유지하는 데 함께하는 사람들은 주권자로서 권리를 보장받은 사람들이라서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자격에 대하여 끊임 없이 기준을 제시하게 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배제하거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차단하려 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공동체 안에서 권리 있는 자들이 만끽하는 민주주의는 자칫 그들 안의 기득권을 공고히하는 명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애초 민주주의가 혼란과 비효율, 고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면, 외부의 주체들과 내부의 주체들이 교합하는 과정의 어지러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한 포럼에서 나는 '근본 없는 민주주의'를 헌법의 체계에서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제를 했다. 여기서 근본 없다는 뜻은 애초 민주주의(민주정) 자체가 데모스에 의한 지배인데, 그 데모스의 본질이야말로 "아르케가 없는"(anarchos) 주체이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통치주체의 제한이나 근원적 원리(arche)의 고정성을 부정하는 아르케가 없는 민주주의(an-archos democracy/grdoundless decomcracy)여야 한다는 취지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법과 제도를 공부하면서도 그 경계선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건, 근거 없는 민주주의가 법적 안정성이나 예측 가능성과 어떻게 갈등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느냐이다. 특히 헌법은 체제의 근간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달리 보자면 체제의 정당화 근거(groundnorm)를 찾는 학문이며 따라서 보수성을 강하게 가지게 되는 학문분야다(물론 그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기에 체제의 정당성을 찾는 방식으로 민주적 정당성, 즉 권력이 주권자로부터 나왔는지를 확인하는 건 헌법학의 기본이 되는데, '근거 없는 민주주의'를 전제하게 될 때 이것은 기성 질서에 도전하는 배제된 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주권의 행사범위 안으로 포섭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만일 외부에 부유하는 정체성이 불분명한 주체들을 주권자의 범위와 그대로 동화하게 되면 사실상 법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붕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고정된 제도가 아닌, 기성 질서 밖으로 배제된 목소리가 체제 안의 목소리와 같은 규모로 밀려 들어올 때 이는 기존 구성원들의 입장에서는 질서의 교란이며 체제 자체가 뒤집어질 수 있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경계선 바깥의 목소리를 부각하고 경계선 내부의 목소리와 경합하게 하는 것은 주체의 각성을 필요로 하며, 안팎이 소요하고 경쟁/투쟁하며 그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정치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는 체제의 근간을 이루던 질서를 교란하며 이 교란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된 치안의 논리와 부딪친다. 이 사태에 직면할 즈음, 어떤 기준으로 어떤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2026년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용지를 제대로 수급하지 않아 발생한 선거 오염 사건은 나의 이러한 고민을 다시금 심각하게 재가동하도록 만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선관위의 문제에 대해선 내가 더 말을 얹을 필요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고, 실제로 선관위의 책임을 묻고 이후 선관위 체제를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에 대해선 각계의 입장들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정리되지 않는 건 선거 그 자체다. 거리에서는 '부정선거'론자들이 물 만난 것처럼 횡설수설 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당은 수세에 몰린 듯 일단 큰 파도만 피해보자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반면, 제1 야당은 그동안의 내분이 무색할 정도로 대립했던 세력들이 이 사태에 공동대응하면서 민주적 정당성을 내세우며 재선거를 주장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나는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 사태의 본질을 뭐라고 봐야 하나? 내가 그동안 공부했던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다면 사태의 해결을 위한 기준은 어떠해야 하는가? 선거관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근거로 재선거를 주장하는 저 음모론자 또는 내란잔당들과 연대할 수 있나? 거리로 몰려나온 저 '시민'들의 성격은 뭘로 봐야하나? 저들이 근거 없는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할 배제 받던 자들인가? 재선거를 하자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소청의 절차로 국한하자고 할 것인가? 소위 진보-좌파세력은 이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나?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제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름의 결론은 좀 더 생각해 본 후 내리겠지만, 그 결론이 너무 늦은 시기에 나올까 두렵다. 난 자꾸만 지쳐가고, 이젠 판단력도 떨어진 거 같다. 공부를 더 해야겠지만, 숏츠에 뇌가 너무 쩔어서인지 이젠 공부도 하기 싫고...</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8?commentInput=true#entry2398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한국 정치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8http://blog.jinbo.net/hi/2398#entry2398commentSun, 07 Jun 2026 14:21:29 +0900트럼프의 삥 뜯는 짓을 보다가...
http://blog.jinbo.net/hi/2397
<p style="text-align: justify;">768 5th Ave, New York, NY 10019</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의 주소다. 비틀즈에서 마를린 먼로 등 유명 연예인은 물론,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등 이름만 들어도 쩌르르한 정치인들이 묵었던 호텔이다. 1907년에 개관한 이 호텔은 1988년부터 2004년까지 현직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소유주였다. 1992년 개봉한 '나 홀로 집에 2'에서 당시 소유주였던 트럼프가 영화에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br />
플라자 호텔은 유명인들의 숙박이나</p>
<p style="text-align: justify;">잘 알려진 영화의 배경으로만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이름이다. '플라자 합의'가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40년 전에 이 호텔에서는 세계 경제의 틀을 재구성하는 주요 국가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지속적인 쌍둥이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미국이 선택한 것은 주요국가(G5,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의 환율 조정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핵심은 달러화의 평가절하였다. 대상국가 화폐의 가치를 올림으로써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이 미국의 목표였다. 플라자 합의 이후 불과 2년 동안 엔화의 달러화에 대한 가치는 플라자 합의 이전의 65.7% 절상됐다(한경닷컴 한경 경제용어사전). 플라자 합의 직전 달러 당 250엔이었던 엔화가치가 120엔대로 절상됐고, 이후 꾸준히 올라 1995년엔 80엔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그 결과 1995년에는 엔화의 평가절하를 목표로 한 '역 플라자 합의'로 이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플라자 합의 초기부터 몇년 간 일본은 비싼 엔화를 들고 나라 안팎에서 부동산에 돈을 쏟아 붓고,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려 들어갔다. 왕창 풀린 저금리 자금이 피라미드를 쌓듯 계속해서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쏠렸다. 60년대 이래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상황에서 엔고와 이에 부응한 경기진작책이 맞물린 결과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소니 대표이사 모리타 아키오가 이시하라 신타로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낸 게 1991년이었는데, 일본 정재계가 이렇게 자신감 뿜뿜할 정도로 당시의 일본 경제상황은 불침항모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1989년 미쓰비시가 록펠러 센터를 매입하자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경악이 터지기도 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이때 횡행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몇 년 사이 자산 시장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품이 끼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폭적인 금리 인상, 급격한 대출규제 실시 등 경제정책이 널뛰기를 했다. 90년 벽두에 터진 주택담보대출 출자총액제한조치 이후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주식시장이 침몰하였다. 은행 도산이 속출하고 원금이 증발하는 대출이 속출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흥청망청했던 사람들이 연거푸 목을 매달았고, 침체한 내수시장, 실업률의 폭증, 산업 공동화 등 경제 전반의 퇴조가 급격히 이루어졌다. 소위 '잃어버린 10년', 아니 그 뒤를 이어 '잃어버린 20년, 30년'의 장기 경기 침체가 이어졌다. 80~90년대 버블기에 매입한 해외투자 덕분에 오늘날에도 막대한 대외순자산 및 외국채권으로 엄청난 해외 수익을 거두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본의 장기 경기 침체의 원인이 오로지 플라자 합의 때문만은 아닐 거다. 플라자 합의 이후 버블 폭발 전까지 수년 간은 일본의 경제가 호황을 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으니 경제 정책 등 다른 원인이 더 중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원인 중 플라자 합의가 트리거가 되었을 수도 있고, 미국의 경기회복이나 한국 경제에 끼친 영향(예컨대 3저 호황)을 보더라도 플라자 합의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계기였음에 틀림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인데, 마침 미국과의 관세 문제와 연관해 트럼프가 3500억불+@를 요구하고 있고, 한국정부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프라자 합의가 생각났다. 찾아보니 바로 며칠 전이 플라자 합의 40주년이었다(합의 일자는 1985년 9월 22일).</p>
<p style="text-align: justify;">플라자 합의 직후 플라자 호텔을 샀던 트럼프가 돈장난을 치면서 우방국으로부터 삥을 뜯으려고 하는 게 묘하다. 흉내를 내고 싶었나...</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축통화국의 주도권을 행사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패권국의 횡포가 40년을 격해 주체와 대상을 달리한 채 반복된다. 이 싯퀴가 금태환 대신 코인태환 가면서 스테이블 코인 굳히기 하고, 그 와중에 지가 만든 코인(월드리버티파이낸셜 WLFI) 상장시켜 7조원 땡기고 앉은 와중에 한국에서 천문학적인 삥을 뜯는 걸 보면, 이건 타고난 장삿꾼이자 전무후무한 수준의 생양아치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경제에 대한 지식은 거의 바닥을 기는 수준이지만, 지금 트럼프가 지 멋대로 쓰겠다며 내놓으라고 하는 3500억달러+@ 규모의 출자는 거품 터졌을 때 일본처럼 한국을 뒤흔들 수도 있는 규모라고 생각된다. 이거 못 주겠다고 하고며 배째라고 하는 게 나을지, 울며 겨자먹기라도 내주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을지, 후일을 도모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해야 좋을지 같은 건 내 지식 수준으로는 논할 깜냥이 안 되니 패스. 그저 똑똑한 분들이 좋은 대안을 좀 내주길 바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7?commentInput=true#entry239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한국 정치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7http://blog.jinbo.net/hi/2397#entry2397commentMon, 29 Sep 2025 20:42:33 +0900조국 사태에 대해 마지막으로...
http://blog.jinbo.net/hi/2396
<p style="text-align: justify;">어차피 당분간은, 아니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날 거라고 보이기에 더 이상 조국에 대한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다. 다만,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했던 나름의 이유는 정리해야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선 조국 본인의 문제. 조국은 80년대 사노맹(이었다고는 하나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에 대해선 논외로 하고) 활동을 했다고 하고, 교편을 잡은 이후에도 소위 ‘좌파적’ 포지션을 취하며 사회개혁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해왔다. 겉으로 보여졌던 그의 삶은 훌륭했으며, 부조리한 사회와 불화하는 인텔리겐챠의 전형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우리 사회가 제대로 진보하기 위해선 이러저러한 이념과 제도와 심지어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비겁하고 치사해서는 안 되며,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지 않거나 그렇게 사는 것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써 부와 명예를 누리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고 주장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바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에 이 사회가 그럭저럭 전진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그럭저럭 사는 데도 버거웠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와 명성을 손에 거머쥔 사람들처럼 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사람은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는 그나마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과정에 조국 같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지난 ‘조국 사태’를 경유하면서, 그동안 그토록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을 했던 사람이 실은 그렇게 살고 있던 ‘가붕개’들은 계속 그렇게 살라고 독촉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너서클의 기득권을 향유하며 그 기득권을 대물림하기 위해 자신이 사람들에게 살라고 했던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국 사태’의 경과는 나중에 살피더라도, 이 사태의 원인제공을 조국이 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당연히 그렇기에 ‘조국’ 사태가 된 것이고, 따라서 이 사태의 원죄를 조국이 감당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요한 건 그 개인의 일탈이 개인적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조국 개인의 문제는 그냥 조국 개인의 문제로 끝날 수 있었다. 그가 누구보다 독특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들, 그런 류의 상류층의 일탈은 부지기수로 보아왔던 일이고, 당사자에 대한 사회적 실망은 그 개인이 책임을 짐으로써 그저 간혹 경험하게 되는 해프닝으로 정리되어왔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국 ‘사건’을 조국 ‘사태’로 확정시킨 건 조국 주변에 포진한 일군의 무리들이었다. 여기엔 조국의 문제가 음으로 양으로 그들 자신의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류도 있었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예컨대 검찰개혁-에 바쳐진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부류도 있었다. 전자와 후자는 그 의미와 지향이 달랐지만, 조국이라는 매개를 공유하며 사건을 사태로 확장하는데 함께 움직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은 조국을 기껏해야 ‘잡범’에 불과한 범법자로 만드는 것의 부당함을 강조하면서 조국을 검찰개혁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으로 승화시켰다. 이들 가운데에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지식인 계급의 구성원들이 있었는데, 나는 조국 사태가 한국사회의 계급적 갈등구조를 치명적으로 심화시킬 것이라는 예감을 이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조국 사태’를 경유하면서 분노하며 수치스러워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조국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면서 보수반동과 대척하는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실정법의 한계를 넘어 민중의 법을 지향하는 법학자였고, 어떤 이는 경제사회적 문제의 근간을 계급적 대립으로 보면서 노동자 민중의 주체화를 고민하던 사회학자였으며, 어떤 이는 교육문화적 측면에서 지배계급에 의해 배제된 소수자의 몫을 드러내고자 했던 문화인류학자였던 등등의 사람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조국 사태 초기에 조국이 어떤 실정법을 어겼느냐며 조국을 감쌌고, 조국의 불법, 탈법, 위법행위가 드러났을 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정도는 관행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부끄러움도 없이 주장했다. 그러더니 결국 조국의 범죄행위는 검찰권력의 자의적이고 과도한 표적수사, 별건수사의 결과로서 부당한 결과라고 하더니 심지어 검찰의 증거조작, 증언교사를 통해 만들어진 조작범죄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제는 이렇게 조국을 감싸고 도는 사람들이 바로 조국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하고, 진보를 위해 이러저러한 투쟁이 필요하며, 노동자 민중이 신념과 원칙을 지키면서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말을 주구장창 해왔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몇십 년씩 평생을 해오던 사람들이 정작 조국 사건이 터지자 자신들이 해왔던 말과는 정반대의 행태를 옹호하면서, 그동안 ‘동지’라고 호명해왔던 이땅의 가붕개를 향해 조국이 나쁜 놈이 아니라 검찰이 나쁜 놈이라며 딴소리를 해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모습을 본 노동자 민중, 특히 청년세대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그동안 저 훌륭한 사람들이 제시하는 올바르고 정당한, 자유와 평등이 만개한 세계를 기대해왔다. 그 세계를 만드는데 바로 저 훌륭한 사람들이 구루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말한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여겨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저 훌륭한 사람들이 결국은 조국과 같은 계급의 일원이었을 뿐이고, 그들의 훌륭한 이야기는 결국 자신들은 가붕개들이 누릴 수 없는 지위에 속해 있으면서 그 기득권을 영구 향유하기 위해 가붕개들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 훌륭한 사람들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계급적 갈등구조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사람들일 뿐임을 알게 된 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국이 실정법을 어겼다는 건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실정법을 어겼냐가 문젠데 사실 그것조차도 앞서 말했듯 그냥 본인이 책임지고 적당히 넘어갔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조국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나? 형법에 위반하는 체제전복적 활동을 했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사상범이나 양심수로 볼 이유가 없다. 강도·강간·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른 강력범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의 범죄는 사문서위조 행사 등의 죄이고 그것도 자기 자식에게 한정된 범죄였으며, 애초 범죄가 없었으면 합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누군가가 그 범죄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만큼의 책임을 지고 자숙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범죄였다. 그래서 ‘잡범’ 소리가 나오는 거고, 사실 그가 할 바를 다했다면 이 소리도 안 나올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담이지만, 바로 이 ‘잡범’이라는 말에 화들짝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들 반응은 어이가 없다. 잡범을 잡범이라고 하지 뭐라고 할 건가? 그가 잡범인 것과 그 잡범 때문에 사회적 사태가 벌어진 건 동시에 논의할 수 있는 이야기다. 잡범이 사회적 사태의 핵심이 된 건 그와 그를 보위하고자 했던 자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교수는 페북 어느 글에 단 덧글에서, “그들(조국과 그 주변 군상)과 서민의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취지의 입장을 개진한 바가 있다. 계급 간 문화적 차이는 그 이격의 정도가 상당하며, 그러한 차이는 부지불식간에 삶의 형태와 발화되는 언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페북 덧글러는 “그들”이라고 표현하면서 마치 자신은 그들과는 다른 위치의 존재인 것처럼 포지셔닝을 한다. 상대적 의미를 가진 지시대명사로서 “그들”은 대상을 가지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 대상이 “서민”으로 나타난다. 그의 표현에서 “그들” 안에 속하지 않은 그는 “서민”의 일원인 것처럼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그들”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문제적 행위를 희석시키고 있다. “서민”과 “그들”이 다르지 않다는 취지로. 어차피 니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도 전문가인 닉네임 ‘환타옹’은 조국사태가 정점을 찍던 시기에 <strong><a href="https://www.facebook.com/fanta2india/posts/pfbid02Ec5rJkwzJymqPrW6gUPjwgwbSAMoh8V8Je2dKpHA22P7uUYmZ1HyFueYwayDW5Xl?__cft__[0]=AZWz1t5q2ocjDdFM3KyfCTL6iAM9y3fD665qxnIrZspDHIFvMLAB2FUjoJI_ggAo5c6SA8BZT8nkhwaDvWAj874GXogbIA2PISGCZgti_GleLfkzPLugfv5L5F_F5649ZSA&__tn__=%2CO%2CP-R">이런 글</a></strong>을 남긴 바가 있다(환타옹 페북에서 펌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0000FF;">“운동이라는 게 결국은 말빚이다.<br />
청춘의 시절 내가 했던 말이 너무나 커서, 차마 다른걸 못하는 일종의 천형 같은 거다.<br />
노동의 신성함을 노래하던 나는 차마 주식같은 거, 투자같은 거, 할 수 없는 거지. 온전히 나의 노동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게, 운동이라 생각한다.<br />
내 주변에는 다행히 그런 사람들이 많다. <br />
꽤 명문가에서 태어나 지금은 꽤 번듯하게 사는 녀석들도 자신이 20대 때 했던 말빚 때문에 지 새끼들 유학도 특목고도 안 보내고 버틴다. <br />
다 조국같은 게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부부가 생각이 같아야 가능한 일인데, 다행히 비슷한 인간들끼리 잘 만나서 잘들 살아낸다.<br />
적어도 나한테 운동이란 그런 거다.,<br />
난 임대아파트에 사는데, 자식이 없어 그런가 심각한 차별 같은건 모르고 산다. 물론 둔해서 그럴수도 있겠으나. <br />
중산층의 놀이터 동네 생협에서 왜 티비에도 종종 나오는 작가가 그런데 사냐는 정말 철없는 질문같은….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다..<br />
이 동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날 알아봤고 세테기 한번 나오니 거의 그때는 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더라.<br />
그 즈음에 9층에 사는 현재 고딩인. 당시 초딩이 그러더라, <br />
아저씨가 같은 아파트 살아서 좋아요.<br />
자기 반에서 친구들과 자기가 아는 유명한 사람 배틀이 붙었는데 같은 아파트 사는 내가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하더라고.<br />
그냥 그때 티비 나왔으니 그런 거겠지만, <br />
울컥했다. <br />
임대아파트 산다고 얘들이 따돌리니?<br />
그렇단다. 자기랑 안노는 아이들 있다고.<br />
강연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걔 기도 살려주고, 실존하는 신기한 털보가 있단 것도 아이들에게 뵈주고, 물론 말은 꺼내지 못했다.<br />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다.<br />
당신이 함께 살아서 다행이다. <br />
송구하고 황송하고, 당황스러운데. 그때 결심했다. 어차피 여기서 쫒겨날만큼 많이 벌지는 못하니(간당간당 걸려있긴 한데) 최대한 여기서 버티겠다고.<br />
그래 이것도 또 내 삶에서의 운동이구나 싶었다.<br />
이런 나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 조국의 삶은 모욕적이다.<br />
물론 나는 그보다는 훨씬 못났지만,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이리 사는건 아니다. 청춘의 시절 내 말빚때문에, 아니 그 옳음을 벗어날 명분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혹은 오기인지도 모르겠다. <br />
내가 내내 분노하는 지점이다. <br />
나와 내가 존경하는 내 친구들의 삶이 무척 웃겨졌다. ㅋㅋ 불법이냐 아니냐? 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나갈쯤 나이 서른에 우리라는 민가가 유행했다. <br />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지금 바라보는 하늘과 같은 하늘이었음 좋겠다. 최소한 내가 타도하고자 했던 저들과 같아지지는 말자고. <br />
이리 사는 사람이 하나쯤 있다고 보여주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해서 버텨내고 있다. <br />
그 지점에서 난 조국이나 혹은 과거 운동의 빛으로 존재하는, 내 옆에 선 사람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랬다. <br />
진보는 부자면 안되냐고?<br />
아니, 하지만 그런식으로 사회적 부와 권력을 쟁취하면 안된다.<br />
한 때, 당신의 동지들은 지금도 각자의 삶에서 그때 했던 이야기 상기하며, 버텨내고 있다. <br />
소소하지만 항상 전선인 어떤 땅에서 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유사한 사례가 내 주변에 무수하다. 자식을 특목고나 유한계급들의 자식이 제법 모인다는 대안학교에 보낼지 고민하다가 일반 고등학교에 보낸 사람들, 여전히 주식이며 부동산이며 코인이며 하지 않는 사람들, 국가건강보험의 건전화를 주장하며 실손보험 등 민간의료보험을 거부하는 사람들, 감당하기 어려운 혹서기에 에어컨을 돌렸다며 죄책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해서 조국보다 못나서 그러고 있었겠는가? 이들은 조국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에게 조국처럼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조국이, 혹은 조국 주변의 수많은 조국들이 했던 또는 해왔던 말들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그 말처럼 살지 않은 조국과 조국들과는 달리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국 사태 당시에도 그렇고, 조국이 사면복권되어 다시 정치를 시작하게 된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조국 개인이 벌린 잡스러운 사건을 ‘조국 사태’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활개를 친다. 바로 이들이 내 분노와 수치의 원천이다. 이런 자들을 믿고 함께 할 동지라고 여겨왔던 내 자신의 안목 없음과 비루함에 분노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국 사태’는 계급적 문제이기도 하고, 공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친 공정담론이 계급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를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보았는데, 그건 웃기는 소리다. 원천적으로 계급적 대립 자체가 계급 간 공정하지 않은 권력관계 때문이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잡범’에게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다른 사회적 문제를 간과하게 만든다는 비판 또한 한가한 잡설에 불과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조국이 잡범인 것과 잡범 따위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비화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잡범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조국 사태는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지금 이런 저런 문제 따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의 사면권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여기에 천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표적인 물타기다. 아닌 말로, 그동안 대통령 사면권이 문제가 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으며, 소위 한마디 한다는 사람마다 그럴 때 말 한마디 안 보탠 적이 있었는가? 새삼스레 이재명의 사면권이 전례 없던 핵폭탄급 문제라고 호들갑을 떠는 건 조국 외의 사안으로 관심을 돌려놓으려는 행태에 불과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게 있어 조국 사태는 이 땅의 기득권 세력, 부와 명예를 독점하고 있는 유한계급은 결국 어떠한 감언이설을 떠든다고 할지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공유하며 다른 계급을 배제하고 소외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계기이다. 특히, 사회적 기생계급에 불과한 지식인 계급이 얼마든지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어 노동자 민중의 등을 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 사건으로 조국 사태는 의미를 가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살아 오면서 만든 관계가 있는 만큼, 난 앞으로도 사적으로는 이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때론 술 한 잔 같이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내 이념적, 사상적 동지도 아니고, 언제든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과거의 소중한 인연을 이토록 살벌한 경계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일조한 조국을 그래서 더욱 용서할 수 없고.</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6?commentInput=true#entry2396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한국 정치 구라계급공정조국조국 사태진보허위의식행인http://blog.jinbo.net/hi/2396http://blog.jinbo.net/hi/2396#entry2396commentSun, 24 Aug 2025 12:50:31 +0900중앙일보 기사 - 이재명 친위라인
http://blog.jinbo.net/hi/2395
<p style="text-align: justify;"><a h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1142">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1142</a></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5?commentInput=true#entry2395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한국 정치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5http://blog.jinbo.net/hi/2395#entry2395commentWed, 04 Jun 2025 08:57:29 +0900...
http://blog.jinbo.net/hi/2394
<p style="text-align: justify;">52.4</p>
<p style="text-align: justify;">36.5</p>
<p style="text-align: justify;">6.8</p>
<p style="text-align: justify;">2.6</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4?commentInput=true#entry239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소소한 일상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4http://blog.jinbo.net/hi/2394#entry2394commentMon, 02 Jun 2025 17:20:39 +0900대선 결선이 헌법사안이라는 변명 또는 사기
http://blog.jinbo.net/hi/2393
<p style="text-align: justify;">대선 투표일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출마자들이 내놓는 각종 공약들 중 정치관계법 개혁에 대한 내용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결선투표' 도입에 관한 논란을 들여다보는데 괘씸한 건 여전히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를 헌법사안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거 하도 이야기해서 입이 아플 정도고 하도 글로 올려서 키보드 치는 손가락이 아픈 실정이지만 다시 한 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한민국헌법의 규정을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제67조 ②제1항의 선거에 있어서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국회의 재적의원 과반수가 출석한 공개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⑤대통령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현행법으로는 유일하게 <span style="text-align: justify;">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 대한 규정이다. 딱 이거 하나만 헌법에 박혀있다보니 말 돌리기 좋아하는 자들이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가 법률사안이 아니라 헌법사안이라고 우겨대는 근거가 되고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저 2항 규정을 잘 보라. 저건 하늘 아래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국회의 판단에 맡긴다는 내용에 불과하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가 반드시 헌법에 정한대로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게 되면, 저 규정의 취지는 현행 헌법 하에서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라는 건 하지 말라고 헌법이 정했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이건 헌법이 필요 최소한의 원칙만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법률에 위임토록 하는 법체계의 일반적 원칙을 부정하는 거다. 이런 원칙을 부정하려면 그 중대한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는데 정작 헌법의 체계는 이런 원칙을 부정하는 행위를 엄금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는 해서는 안 된다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헌법이 스스로 어떠한 중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헌법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이건 어떠한 해석론에 따르더라도 설득이 되지 않는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합목적적익이고 법적 정의에 입각한 헌법해석에 따르면, 저 규정은 도저히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을 때 주권자가 행해야 할 권한의 일부를 국회에 위임했다고 보아야만 한다. 즉, 주권자의 의사가 완전히 정확하게 절반으로 갈려 있을 때 이러한 극단적 대립을 완화할 책임이 국회에 있다는 걸 표현했을 뿐이고, 그러한 사정 이외의 상황일 때는 제5항에 따라 선거법에 결선투표에 관한 사항을 정하면 된다는 거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걸 지들 멋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때는 법률사안이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헌법 사안이라고 하는 갈짓자 행태가 벌어지는 거다. 기실 입법부나 그 외 법 전문가들이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를 헌법 사안이라고 하는 건 무지에 의한 결론이 아니라면 대국민 사기질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현행 헌법에 저 67조 2항이 삽입된 건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과거 제1차 개헌 당시의 규정을 그냥 갖다 넣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 대통령 간선에서 직선으로 바꿀 때, 간선에서나 통하던 결선투표방식을 별다른 생각 없이 직선에도 꽂았기 때문인데, 이걸 박정희가 쿠데타 헌법 만들면서 얼씨구나 집어 넣었고, 그 이후 관성적으로 개헌안에 넣어놨던 게 오늘날 이 사달을 만들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헌법은 헌법이지만, 헌법의 해석원리로 볼 때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는 법률사안임이 분명하다. 제발 헌법사안이라고 사기치는 짓은 이제 그만 좀 하자, 이 사기꾼들아...</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3?commentInput=true#entry239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법과 제도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3http://blog.jinbo.net/hi/2393#entry2393commentTue, 27 May 2025 10:52:35 +0900오늘
http://blog.jinbo.net/hi/2392
파와 면의 행진을 일단락 하고 이제 귀가 중인데...
솔직히,
아주 솔직히,
약간의 불안이 없을 수 없었다.
온갖 뇌피셜이 난무하는 과정에도 난 누가 물어보든 8:0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거 좀 뭔가 아닌 게 나오나싶은 의구심이 들기 시닥하는 거다.
하지만 난 전원일치 합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건 확신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내 인생 전부가, 아니 최소한 법을 공부한 이후 30년동안 쌓아온 내 가치관 일체가 부정당한다는 절박함이었다.
내가 배운 바, 그리고 내가 정립한 원리에 의한 바, 반드시 오늘의 결과가 나와야만 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내 지난날의 모든 것이 허위의 모래성이었음을 인정하고 속세와 연을 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세운 그 원칙을 부정한 세계와 격렬히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 갈림길의 고뇌는 말끔하게 정리됐다. 그런데 이 말끔함은 내가 가져온 게 아니다. 난 그만 무수한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야 말았다.
그동안, 간난신고를 마다않고 거리에 선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나날을 보냈다. 오늘 나름의 알량한 원칙이 그래도 무너지지않고 자리를 지키게 된 건 순전히 그 혹한의 길바닥에서 응원봉을 쥔 채 물러서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덕분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제와 주제넘게 원리니 원칙이니 혀를 놀리기는커녕 더 이상 내 가진 생각을 떠들 게제도 없었을 거다.
이 밤, 거리와 광장을 지켜낸 모든 분들에게 깊은 존경의 염을 담아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2?commentInput=true#entry239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행인http://blog.jinbo.net/hi/2392http://blog.jinbo.net/hi/2392#entry2392commentFri, 04 Apr 2025 23:52:36 +0900삼권분립이 녹아내린다
http://blog.jinbo.net/hi/2391
<p style="text-align: justify;">메모 계속...</p>
<p style="text-align: justify;">체제가 녹아 내리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만드는 건 민주공화정 운영의 대원칙 중 하나로 여겨왔던 삼권분립체계가 형해화되고 있다는 점.</p>
<p style="text-align: justify;">삼권분립의 핵심은 입법, 행정, 사법 간 견제와 균형.</p>
<p style="text-align: justify;">로마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으로 전환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권력의 집중이었음을 간파한 몽테스키외가 권력을 기능(입법, 행정, 사법)별로 분리하여 각각에 맞는 기구를 편성해 독립적 권한을 주도록 설계.</p>
<p style="text-align: justify;">권력의 분산과 각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은 이권분립이든 삼권분립이든 아니면 그 이상으로 분립하든 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p>
<p style="text-align: justify;">삼권분립의 경우,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기 위해선 권력의 세 축이 같은 무게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p>
<p style="text-align: justify;">"특정 권력의 일방적인 우위를 배제하고 각 권력기관의 본질적 기능을 조화롭게 유지하면서 궁극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 권력분립원칙이 추구하는 이상(理想)"(2021.1.28. 2020헌마264, 681(병합)</p>
<p style="text-align: justify;">2025년 현재, 한국의 삼권분립은 삼권 독주로 변질</p>
<p style="text-align: justify;">견제를 초월한 적대가 만연하고 균형은 아예 상실된 상태</p>
<p style="text-align: justify;">입법부는 원내 보수양당의 힘겨루기만이 남은 채 정치적 방향설정도 못하면서 행정부와 사법부를 비난하기 바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행정부는 입법부의 결정과 사법부의 결정을 깡그리 무시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법부는 구색을 갖추는 수준에서 결정을 할 뿐 입장에 따라 법 창안적 행위를 하거나 시간 끌기를 하고...</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이 사달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삼권분립'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대한 권력기관 간의 합의에 불과하며, 이 합의는 어떤 촉발점에 의해 얼마든지 깨질 수 있다는 것</p>
<p style="text-align: justify;">권력분립의 합의가 깨지는 순간 '헌정질서'라는 건 허구일 따름이며, 모든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의 작동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남는 건 체제의 붕괴</p>
<p style="text-align: justify;">태양이 내일 솟을 것을 의심치 않기에 일상을 지속할 수 있듯,<br />
체제가 유지될 수 있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일상이 지속되는데,<br />
이러한 신뢰가 다 깨지는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은 삼권분립이라는 작동방식이 탈없이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p>
<p style="text-align: justify;">"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의 선언을 상기</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레히트가 그의 시 '바이마르 헌법 제2조'에서 묻는 것처럼,<br />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br />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라고 물어야 하는 시국</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상황은 그 뭔지 모를 주권이 "아무튼 어디론가 가기는 가겠지"라고 체념하고 말 것인지<br />
그 "어디"를 주권자가 직접 찾아줘야 할 것인지를 판단해야만 할 시기가 된 듯</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또 꼬리를 무는 문제는, 주권자는 의사의 통일체로서 기능하고 있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주권자를 구성하는 낱낱의 인자들이 일관되게 그 "어디"를 가리킬 수 있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지 않다면, 주권의 행사가 담보해야 할 민주적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p>
<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1?commentInput=true#entry2391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한국 정치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1http://blog.jinbo.net/hi/2391#entry2391commentMon, 31 Mar 2025 11:34:25 +0900'법의 보편성'이라는 허울이 깨져 나갈 때
http://blog.jinbo.net/hi/2390
<p style="text-align: justify;">법치주의를 지탱하는 원리 중 하나로 법의 보편성이 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법언이 여기서 출현한다. 법은 가장 강력한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이다. 윤리나 도덕처럼 일정한 행동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반드시 집행력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양심에 맡겨지는 윤리나 도덕과는 전혀 다른 존재양식을 가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외부적 통제가 가해지는 만큼, 법은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사회공동체의 유지와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법을 수긍하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중요한 것이 법의 보편성이다. 힘을 가진 자나 힘이 없는 자나 같은 유형의 행위에 대해선 같은 규범이 적용된다는 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법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까지는 매우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법은 보편성을 유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작동하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법이 성립하는 순간부터 효력을 발휘할 때까지, 법은 그 성격상 보편적일 수가 없다. 법은 정치적 쟁투에서 승리한 자의 선언문이기 때문이다. 법의 보편성은 규범의 문구가 아니라 그 법을 작동시키는 힘에 따라 낯빛을 바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법의 힘이 작동하는 배경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법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법을 집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법을 해석하는 자는 누구인가? 즉 입법, 행정, 사법의 주체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주체 외의 주체들에게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가가 법의 효력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할지를 결정한다. <span style="text-align: justify;">법은 법의 형성과 작동, 재구성을 담당한 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통상 입법, 행정, 사법의 주체는 하나의 패키지로 움직인다. 즉, 입법기구의 주체, 행정기구의 주체, 사법기구의 주체는 통상적으로 하나의 계급에 속하는 인자들로 구성된다. 주요 인자들이 각 기구에 편입되는 과정은 다양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부분의 인자들은 역시 같은 계급에 속해 있다. 이렇게 입법, 행정, 사법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계급을 지배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에는 언급되는 사례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은 <span style="text-align: justify;">법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때에 </span>상당한 편익이 있다. 지배계급의 이해가 관철된 체제를 피지배계급이 동의하도록 유인하는 방책으로서 법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매우 유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법의 보편성이라는 대전제 아래, 피지배계급이 법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실정법 체계는 정당성을 확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지배계급의 힘이 강력할 때, 법의 보편성은 지배계급 내부의 구성원들에게만 의미를 가진다. 지배계급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하는 한, 지배계급 외의 계급에게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구호는 그저 체제를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압력을 유연하게 표현한 당의정일 뿐이다. 법의 보편성은 지배계급에 대댱하는 계급의 힘에 의해 보장될 뿐이다. </span>법은 그 적용의 대상이 힘이 있을 때는 하염없이 겸손하지만 그 대상이 힘이 없을 때는 악귀야차로 돌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란정국에서 보수양당, 검찰, 공수처, 법원이 취하고 있는 행태는 법이 누구의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검찰개혁이니 공수처 설치니 하며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던 외양과는 달리, 보수양당의 구성원들은 사실상 하나의 이해관계로 엉켜있는 인자들이라서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대립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에서 발생한 대립과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보수양당은 물론이고, 면죄부를 두고 다투면서 법을 이용하는 검찰, 공수처, 법원 모두가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검찰개혁이나 공수처 설치는 단지 보수양당 사이에서 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면피의 방법을 찾는 과정에 불과했다. 집권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적을 제거하거나 아군을 면죄하는데 유용한 수단을 두고 서로 서로 대치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내로남불, 즉 내가 집권하면 이용하고 저쪽이 집권하면 탄핵하는 티키타카만이 지속된다. 여기에 피지배계급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결국 공수처법이나 검찰개혁은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분배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지배계급 내부에서조차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법을 장악하려 다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란세력과 이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법을 무시하지만 법은 이들을 보위한다. '헌정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헌정질서 파괴세력이 오히려 헌정질서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진다. 법의 보편성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깨진다. 그리하여 다시금 물음은 본원적이어야 한다. 도대체 이 법은 누구의 법인가? 누가 만든 법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법의 보편성을 내 삶의 효용으로 만끽하고 싶다면, 더 이상 저들에게 입법권과 행정권과 사법권을 맡겨둬서는 안 된다. 아니, 적어도 법이 그 보편성, 추상성의 가치를 저들에게만 보장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라도 저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체제전환'이라는 지향이 그저 대기 속으로 희석되어갈 구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아스팔트 위에서 피어난 전복의 열망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적 실체로 형성될 때에야 비로소 법의 보편성이 저들만의 노획물로 남게 되지 않을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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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a href="http://blog.jinbo.net/hi/2390?commentInput=true#entry2390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법과 제도 구라행인http://blog.jinbo.net/hi/2390http://blog.jinbo.net/hi/2390#entry2390commentMon, 10 Mar 2025 14:31:07 +0900독재의 방지책으로서 지역정당
http://blog.jinbo.net/hi/2388
<p style="text-align: justify;">반지성주의는 곧잘 반민주주의로 이어진다. 반지성주의는 파시즘으로 쉽게 이어진다. 어떤 파시스트는 자신이 매우 지성적인냥 하기도 한다. "내가 누구보다 많이 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안다고 자부하는 지식은 구체적 실천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그가 안다고 하는 지식은 그의 파시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지성주의에 기반한 반민주주의의 최종 도착지는 독재다. 독재는 무제한한 권력을 욕망한다. 독재는 권력을 향한 욕망의 한계를 설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span style="text-align: justify;">사회적 한계</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가 그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결국 독재는 폭주하게 되고 스스로는 물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 사회적 상처가 얼마나 크고 위중한 것인지에 대해 독재는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이 욕망대로 행사되지 않는 것을 상처로 여길 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반지성주의와 반민주주의의 결착, 이 결착이 만들어내는 후과의 극명한 사례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윤석열의 내란, 내란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의 준동, 이들에게 포섭된 극우의 현현과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2024년 연말의 12.3. 내란은 아직 종결되지 않고 있으며 바야흐로 내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내란 우두머리와 그 추종세력은 자신들의 무지와 독선을 감출 생각이 없다. 이 무지성적이고 반민주적인 자들의 망동으로 <span style="text-align: justify;">이성적 사고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적, 심적으로 고통받는 중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태의 시작과 그 의미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석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권력의 집중과 그 폐해이다. 그리고 이 심난한 시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안을 고민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권력의 분산 및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알렉시스 토크빌의 통찰은 이러한 분석과 대안마련에 일정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들여다본 토크빌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오늘 한국의 사태와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권력의 중앙집중과 그 폐단을 막을 방법으로서 지방분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크빌은 중앙권력이 국가의 모든 부분을 다 꿸 수 없음을 직시한다. 중앙으로 권력이 집중될 수록 지방의 정신은 축소되고, 이것은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권력이 집중됨에 따라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즉, 다수의 평온한 지배가 흔들리는 것이며, 그 결과는 독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정치는 권력의 중앙집중을 전제로 구조화되어 있다. 보수양당이 정치자원을 분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승자독식이 보장되는 대의구조가 보수양당 간 끊임 없는 집권경쟁을 조장하면서 권력의 집중현상을 더욱 강화시켜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지성의 반민주적 인사가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집중된 권력을 사적으로 전유하게 되었고, 이를 공고화하기 위해 내란을 일이키기까지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일 권력의 중앙집중을 견제하고 정치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분권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근본적으로 지방정부의 분권은 중앙정부의 폭주를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풀뿌리에서부터 건강하게 확립된 민주적 정치구조는 독재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의가 국회를 장악한 보수양당에 의해 포획되고, 행정부는 집권자의 수족으로 전락했을 때, 이를 제어하고 흠결을 치유할 수 있는 유력한 힘은 변방에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은 그 변방이 중앙을 견제할 수 있는 변변한 권한도 없는 상태에서 물적 기반마저 형해화된 상태다. 당장 맞부닥친 윤석열의 내란은 어떻게든 수습을 하고 넘어갈지라도, 정치자원과 권력의 중앙집중적 행태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내란이 잠복된 민주주의의 위기는 영원히 상존하게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재인 정부의 개헌 기조 중 하나는 연방제에 준하는 분권자치였다. 비록 말로만 떠들다 흐지부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방향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 강력한 <span style="text-align: justify;">지방분권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지방분권의 핵심은 지방정치의 활성화이다. 분권자치의 현상은 행정으로 나타나지만, 그 행정은 결국 정치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지방의 정치가 제 자리를 찾고 건강하고 활발하게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지방분권은 실체를 형성할 수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지방정치를 살리기 위한 최우선의 과제는 보수양당체제를 해체하는 것이다. 보수양당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방의 정치적 독립이야말로 지방분권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지역정당이 창당되고, 지역정당의 활동을 통해 지역정치인을 주민이 스스로 발굴, 육성하며, 중앙정치에 얽매이지 않고 지역의 의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은 이로써 그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사회에서야 무지성의 반민주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를 꿈꿀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지역정당은 "민주주의의 학교"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책임감과 수치심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책임감과 수치심은 독재자가 가질 수 없는 민주적 시민의 덕목이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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